몇 해 전, 은행 인사 발령 명단을 훑다가 후배 한 명의 이름에서 눈이 멈췄습니다. 이름 옆에 적힌 두 글자는 ‘퇴직’이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 PB센터를 이끌던, 누가 봐도 잘나가던 지점장이었거든요. 준정년(만 56세)까지도 아직 2년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멀쩡히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면, 다들 먼저 이런 생각부터 합니다. ‘무슨 일 있나? 징계인가, 사고인가?’
사실 은행에선 이런 경우 십중팔구 좋지 않은 사연부터 떠올립니다.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옷을 벗으면, 징계나 금융사고 같은 일이 얽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후배는 징계도, 사고도 없었습니다. 멀쩡히 잘나가던 지점장이 스스로 사표를 낸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수군거렸죠. ‘도대체 왜?’
잠깐 — 은행원의 ‘정년’은 조금 다릅니다
본론에 앞서 하나만 짚고 갈게요. 흔히 ‘정년’이라 하면 법으로 정해진 만 60세를 떠올립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죠.
그런데 은행은 좀 다릅니다. 대다수 은행에는 ‘준정년 제도’가 있어서, 만 56~57세(은행마다 1년쯤 차이) 무렵 임금피크에 들어갈지, 아니면 명예퇴직금을 받고 미리 나갈지를 선택하게 합니다.
명예퇴직금은 법정 정년(60세)까지 남은 기간을 어느 정도 보상해 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상당수는 이 준정년 제도에 맞춰 은행을 나섭니다. 국책은행 정도를 빼면 거의 모든 은행이 이렇게 운영하죠.
결국 은행원에게 사실상의 정년은 만 56~57세인 셈입니다. 이 글에서 그냥 ‘정년’이라 하면, 바로 이 준정년(만 56세)을 가리킵니다.
20년을 함께한 후배
후배 S는 20년 전, 본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상품개발부, 저는 마케팅부. 같은 층에서 근무했죠.
두 부서는 늘 붙어 일하는 사이였고, 코드도 잘 맞아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성격 좋고 일도 야무져서, 나중엔 연수원 수신상품 교수까지 맡았죠.
신입 직원들에게 인기도 많았습니다. 어디에 두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후배였습니다.
실버타운 지점의 웃픈 하루
연수원 교수를 마친 뒤, S는 한 실버타운 안에 자리한 지점의 부장으로 갔습니다. 어르신들이 주 고객인 특별한 지점이었죠.
한번은 그가 좀 지쳐 보이길래, 제가 웃으며 놀렸습니다. “연수원에서 젊은 신입들과 있을 땐 기운 받아 좋아 보이더니, 여기선 어르신들 옛날 이야기 하루 종일 들어드리고 나면 진 빠지지?”
그가 답했습니다. “형님, 어떤 땐 이야기 듣다가 저도 모르게 같이 졸아요.” 둘이 한참 웃었습니다.
그 지점 어르신들에겐 은행 나들이가 유일한 외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의관정장 반듯이 갖추고, 9시 문 열자마자 오셨다더군요. 그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돌아보면 S는 이렇게 젊은 신입부터 연륜 깊은 어르신까지, 온갖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잔뼈가 굵었습니다. 그 시간이 훗날 낯선 벤처에서도 사람을 다루는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걱정할 때, 나는 “웰컴”을 외쳤다

그 후 S는 본점 영업부 PB센터를 거쳐, 강남의 손꼽히는 PB센터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준정년(만 56세)을 2년 앞두고 사표를 낸 겁니다.
사람들은 전화해서 하나같이 걱정만 했습니다. “잘나가는 은행을 왜 그만두냐”고요. 그리고 그렇게 통화를 끊었답니다.
은행원에게 그 안정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다는 건, 남들 눈엔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던 거죠.
저는 달랐습니다. 퇴근길에 바로 전화를 걸어, 대뜸 “웰컴!”부터 외쳤죠.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오너가 확실한 작은 벤처기업의 경영총괄 임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자동차 관련 기술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회사였죠. 저는 진심으로 “정말 잘했다”고 했습니다.
왜 나는 걱정 대신 축하했을까
계산이 그랬습니다. 은행에 남아봐야 준정년까지 2년, 운 좋게 임원이 돼도 잘해야 58세면 끝입니다.
반면 오너가 확실한 벤처에서 회사를 함께 키우면, 스톡옵션 같은 기회도 있고 정년 걱정 없이 오래 뛸 수 있습니다.
‘2년 더 버티느냐, 새 판에서 십 년을 뛰느냐.’ 같은 시간이라도 그 무게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도전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작해야 유리하죠.
은행에서의 마지막 2년은 대개 자리를 지키는 시간이지, 새로 무언가를 일구는 시간이 아닙니다. 반면 벤처에서의 2년은 회사를 함께 키우며 내 지분과 미래를 만드는 시간이 될 수 있었죠. 저는 그 차이가 결정적이라고 봤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S가 그랬습니다. “형님처럼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확실히 생각이 다르시네요.” 다들 걱정할 때, 그 한마디가 힘이 됐던 모양입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세월이 흘렀습니다. S의 동기들은 이미 몇 해 전 은행을 떠나, 상당수가 쉬고 있거나 최저임금 수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S는 지금도 그 회사의 경영기획 총괄로 왕성하게 일합니다. 회사는 그사이 안정되고 성장해, 사옥까지 마련했죠.
저와는 지금도 주기적으로 골프를 치는 사이입니다. 은행을 나설 때만 해도 ‘모험’이라 불리던 선택이, 지금은 누구보다 단단한 현역의 자리가 된 셈입니다.
요즘 조기퇴직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사실 S 같은 선택은 점점 드물지 않습니다. 은행권 희망퇴직은 대상 연령이 40대까지 내려왔고,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이미 40대 후반(약 49세)이라는 조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 10년 넘는 ‘소득 공백’이 생기고, 사람들이 일하고 싶어 하는 나이는 평균 70대 초반이라 그 공백이 13년에 이른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재취업 시장도 녹록지 않습니다. 임금이 낮거나 단기·시간제 일자리가 많아, 전문성을 제대로 살릴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조기퇴직은 ‘언제 나가느냐’보다 ‘나가서 무엇을 할 준비가 됐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돈은, 준비된 사람이 웃습니다
이 지점에서 은행원은 조금 유리합니다. 은행권 희망·명예퇴직금은 두둑한 편입니다. 대개 월 급여의 20~30개월치에, 많게는 억대에 이르기도 하죠. 그 목돈이 소득 공백을 버티는 실탄이 됩니다.
하지만 목돈만으론 부족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예요. 첫째, 퇴직연금·국민연금·개인연금 3층으로 ‘매달 들어오는 돈’을 만들어 두는 것. 둘째, 저임금 단기직이 아니라 내 전문성을 살릴 자리로 옮기는 것.
S가 웃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둘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3층 연금으로 바닥을 깔아 두었고, 단순 재취업이 아니라 ‘경영총괄’이라는 전문성을 살린 자리로 갔죠. 준비된 조기퇴직과 떠밀린 조기퇴직은, 그래서 결말이 다릅니다.
은행원의 노후, 그리고 한 가지 당부
그러니 S의 이야기는 운 좋은 개인의 무용담이 아닙니다. 준비가 만든 결과에 가깝습니다.
노후 소득의 바닥을 미리 깔아 둔 사람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고 싶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 여유가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백세 시대에 젊게 사는 법은 어쩌면 간단합니다. 새 도전을 한 살이라도 빨리,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할 때 결단해 움직이는 것.
여러분도 50세 이전이든 이후든, 제2의 인생을 고민할 때가 옵니다. 그때 망설임 없이 결정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해 두시길 권합니다.
정년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도 또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며, 특정 이직·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본문에 인용한 퇴직 연령·소득 공백 통계는 공공 조사 및 관련 언론 보도를 참고했으며, 퇴직·연금 준비는 국민연금공단 등 공식 기관 정보를 함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작성: 30년 은행 근무 경력의 뱅커노트, 2026년 9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