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바꾼 친구가 있습니다. 오늘은 정년 후 제2의 인생을 활짝 연 친구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 처음 사귄, 가장 오랜 친구 C입니다. 은행 지점장으로 정년한 뒤의 이야기죠.
나에게 기타를 가르쳐준 친구
친구 C는 예능적 재능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제가 기타를 처음 배운 것도 이 친구에게서였죠.
1980년대 초, 중·고 시절 우리는 학교 축제와 교회 ‘문학의 밤’을 함께 누볐습니다. C는 만돌린, 저는 기타. 둘이 합주를 하러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만돌린과 기타 두 대로 무대를 채웠죠. 서툴렀지만, 그 시절만큼 순수하고 겁 없던 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작은 무대들을 그렇게 함께 채웠습니다. 벌써 40년이 지났네요.
첫 시집을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C는 국문과에 진학해, 대학 시절 시를 참 많이 썼습니다.
그 습작들을 보며 저는 약속했죠. “네 첫 시집은 내가 내줄게.”
그리고 제가 군 복무 중이던 어느 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친구가 쓴 시 28편을 모아, 을지로 인쇄골목을 찾아가 100권을 찍었습니다.
정식 데뷔 시집은 아니었지만, 지인들에게 한 권씩 나눠준 우리만의 첫 시집이었죠.
얼마 안 되는 군인 월급을 쪼개 인쇄비를 치르고, 휴가를 나와 을지로 골목을 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친구가 그 책을 처음 손에 쥐던 표정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제목은 ‘새벽하늘 새벽나라’. 표지를 다시 보니 그때가 눈에 선합니다.

그 안에 실린 시 한 편, ‘슬픈 방법’입니다. “인쇄된 양심뭉치를 던지는, 손이 차가운 소년에게…” 스무 살 청년의 문장이 아직도 서늘합니다.
접어야 했던 미대, 그리고 은행원의 길
사실 C는 음악만큼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미대를 준비하던 친구였죠.
하지만 고2 때, 집안 형편 때문에 미대를 접고 국문과를 택했습니다. 꿈 하나를 가슴에 묻은 겁니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 시절 많은 청춘이 그렇게 ‘하고 싶은 것’ 대신 ‘해야 하는 것’을 택했죠.
대학을 마친 뒤 C는 ROTC 장교로, 저는 공군 전산병으로 각자 군 생활을 했습니다.
제대 후 C는 국책은행에 들어갔습니다.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 그대로, 본점 주요 부서와 지점을 두루 거쳐 지점장으로 최근 정년을 맞았죠.
골프공에 그림을 그리는 지점장
그런데 C는 은행원이 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지점장 시절엔 골프공에 직접 그림을 그려 주요 고객들에게 선물하며 영업을 했다고 합니다. 취미가 아니라, 그의 ‘시그니처’였던 셈이죠.
골프공을 받아 든 고객들은 하나같이 놀랐다고 합니다. 은행 지점장이 직접 붓을 든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이건 그가 골프공에 그린 화투 48장. 한 알 한 알이 작품입니다.

얼마 전 제 생일엔 5광과 달마를 그린 골프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이죠.
솔직히, 예능적 소질이 없는 저는 늘 이 친구가 부럽습니다.
정년 후 제2의 인생, 미뤄둔 꿈을 꺼내다
C는 정년을 9개월 앞두고 조용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는 그림과 패션을 접목하겠다며 패션디자인 학원에 다닌 거죠.
그리고 지난달, 수료증과 함께 패션디자인 강사 자격까지 땄습니다. 얼마 전 점심 자리엔 본인이 디자인한 그림을 넣어 만든 면 티셔츠를 입고 나왔더군요. 눈이 반짝였습니다.
평생 숫자와 서류를 다루던 사람이, 예순을 앞두고 다시 붓과 원단을 잡은 겁니다. 미뤄둔 꿈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셈이죠.
C는 공무원연금이 없는 은행원이었습니다. 대신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까지 3층으로 쌓고 재테크도 꾸준히 해, 일하지 않아도 노후가 넉넉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재취업’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마침 다니던 학원의 이사장이 은퇴를 앞두고 학원을 맡아줄 사람을 찾다가, C에게 함께 해보자 제안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 진정성 때문이겠죠.
은행원으로서, 한 가지만
C를 보며 저는 생각합니다. 노후의 진짜 자산은 통장 잔고만이 아니라는 것.
미뤄둔 꿈 하나, 오래 갈고닦은 재능 하나가 정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물론 그 바탕엔 ‘준비된 노후’가 있었습니다. 연금과 재테크라는 바닥이 있었기에, C는 돈이 아니라 꿈을 좇을 수 있었죠.
많은 분이 정년을 ‘끝’으로 여기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는 오히려 정년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선이 됩니다.
정년을 앞두셨다면, 통장과 함께 ‘가슴에 묻어둔 꿈’ 하나도 꺼내 보시길. 친구 C처럼요.
같은 정년, 다른 노후. 다음 편에서도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 개인 경험과 공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글이며, 특정 투자·재무 자문이 아닙니다. 국민연금·퇴직연금 등 노후 준비는 국민연금공단 등 공식 기관 정보를 함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